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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노의 모든 번역서들, 그것들의 작가소개에는 에르노가 한 이 말이 반드시 씌어 있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작가의 말. 본인의 경험만을 쓴다는 그녀의 이번 소설 '집착'은 질투에 대한 것이다. 본인이 차버린 연하의 남자, 그가 사귀기 시작했다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에 대한 질투. 그리고 헤어날 수 없는 집착으로 인한 고통. 헤어진 남자는 '나'와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그의 여자에 대해 아무 것도 알려주려 하지 않고, 철저한 그의 방어는 '나'로 하여금 더욱더 여자의 이름을 알아내고자 하는 강박관념에 빠지게 만든다. '알아내고자하는' 욕망에 대한 집착과,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 대한 집착으로 온통 사로잡혀버린 절대적이고 무기력한 occupation에 대한 글이다. 부끄러움없이 자신을 다 드러낸 에르노의 글은 사실 읽기에 민망하다. 남자와 여자에 대해 내뱉는 상스럽고 원색적인 말들, 빵으로 인형을 만들어 핀이라도 꼽고 방자하고 싶어하는 창피하지만 솔직한 욕구, 섹스 혹은 자위행위에 대한 거침없는 언급..모든 것이 너무나 저열하고, 여성잡지의 치정 사건 기사에나 실릴 법한 이야기다. 글쎄..혹 남편이 바람이 나면 모든 여자들은 다 이렇게 되는 걸까? 나도 이렇게 될까? 생각만해도 부끄러운데, 에르노는 질투를 하는 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던 모든 추잡한 생각들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난 이 얇은 책을 읽으며, 사실 욕망이나 집착이나 사랑에 대해서보다는, 글쓰기에 대해서 계속 생각했다. 타르콥스키의 영화 '잠입자'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이, 불거져나온 치질처럼 수치스러워." 에르노에게는 이런 수치심이 없는 것일까? 에르노는 이 소설에서 욕망과 질투에 대해 이야기하는 만큼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런 말을 한다. "글쓰기,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서 행하는 것이다....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내 일기장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는 꽁꽁 숨겨둔 일기장에 끄적일때조차도 타인의 시선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슬쩍 일기장을 꺼내볼지도 모를 그 누군가의 시선으로인해 내 언어는 온전히 솔직하지 못하다. 그런데 자신의 글을 세상에 던져놓아야하는 작가의 입장에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글을 쓴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에르노는 이 소설 맨 첫줄을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나는 죽고, 더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정말 쓰고싶은 것을 제대로 쓴다는 것에는 죽음마저 연관지어질만큼 처절한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에르노를 이렇게 솔직하고 대범하게 만드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그녀의 욕망이다.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에 불과했던 것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실체로 변모시키려는 욕망. 질투나 집착처럼 개인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물질성을 부여하고, 더 이상 '나의 욕망'이나 '나의 질투'가 아니라 그저 욕망 그 자체, 질투 그 자체의 실체를 탐구하고 파헤치고 발가벗기려는 욕망. 그러한 강렬한 욕망이 에르노로 하여금 타인의 시선을 무시할 수 있는 용기와 집중력을 갖게 한다. 에르노는 이렇듯 이 소설 많은 부분에서, 내밀한 부분을 부끄러움없이 드러내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다. 얽히고 썩어있는 감정의 덩어리를 일기로 풀어내야하는 나는.. 때때로 블로그에, 사실 거의 아무도 찾지 않는 넷 상의 어떤 공간에 무언가 가끔 끄적여줘야하는 나라는 사람은 에르노의 글쓰기의 욕망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진지하게 소설쓰기 따위 해본적이 없음에도 작가들의 글쓰기의 욕망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는 모두 조금씩 짐작하고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나 자신도 그러하면서 에르노의 아니, 작가라는 사람들의 그러한 욕망이 용서되지 않는 까닭은 뭘까? 그들의 배설욕에 대한 혐오감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왜일까..난 그 답을 밀란 쿤데라의 말에서 찾는다. "책쓰기를 좋아하는 사람, 미지의 독자대중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 -> 자신의 자아를 남에게 부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권력에의 의지의 가장 그로테스크한 각색." 불거져나온 치질만큼이나 수치스러울 수 있는 글쓰기에서 수치심보다 강한 것이 쓰고자하는 대상의 실체를 파헤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과 집중력이라면, 그러한 욕망과 집중력을 가능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권력에의 의지인 것이다. 에르노 역시 한 문장에서 그러한 권력욕을 표출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자신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형체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 그것들을(작가에 의해 실체화된 관념) 제 것으로 삼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에르노에 대해 갖고 있는 내 혐오감의 이유인 것 같다. 그 어떤 작가보다도 용감하고 솔직한만큼 그녀의 권력욕이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 꼭 모든 글이 경험한 사실 그대로 씌어져야하는지 사실 이해할 수 없다. 대개의 자전적 소설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경험에 약간의 시공간적 장치만 곁들이면 되는데, 왜 굳이 실화임을 강조하는 것일까. 그저 출판사 마케팅의 문제인 것인가? 독자들의 관음욕구를 자극하는 선정적 마케팅 전략으로 느껴져서 반감을 갖게 한다. 흠....이렇게 불만이 많으면서 에르노 소설을 4권이나 갖고 있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칫. 나 역시 관음증 환자? 에르노에 대한 투덜거림은 이쯤으로 하고, 다음은 '집착'을 읽으며 와 닿았던 문장이 있다. 질병이나 우울증으로 심약해진 사람들처럼, 나는 온갖 고통이 울려 퍼지는 공명상자가 되어버렸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첼로를 떠올렸다. 커다란 몸통이 온통 공명상자인 첼로는 조금만 건드려도 몸이 울어댄다. 약간의 외부자극에도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공명상자. 오랫만에 고통에 대한 참으로 아름다운 비유를 읽은 것 같다. 이보다는 좀 처절하지만 무척 공감했던 다른 문장이 있다면 크리스타 볼프의 '어디에도 설 땅은 없다'의 한 문장이다. "박사님, 당신은 피부가 벗겨진 채로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야 하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어떠한 소리에도 고통을 느끼고, 어떠한 빛의 번득임에도 눈이 시어지고, 공기와 아무리 가벼운 접촉을 하여도 쓰라림을 느끼는 사람 말입니다. 박사님, 제가 바로 그러합니다." '집착'에서 나를 낄낄거리게 한 문장이 있다면..'나'는 헤어진 남자의 여자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온통 인터넷을 뒤지고, 전화번호부를 뒤지고, 찾아낸 모든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고, 남자가 흘린 아주 작은 단서로부터 재빨리 머리를 굴려 또다른 단서를 알아내고는 한다. 이것에 대해... "이러한 탐색과 광적으로 여러 단서들을 짜맞추는 행위를 보며 지능의 탈선적 사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라고 쓰고 있는데...지능의 탈선적 사용이라는 이 말이 너무나 우습고 재밌다. 내 주위에 이런 사람이 너무 많다. 큭큭...한마디 해주고 싶다. "너, 지금 지능의 탈선적 사용중이셔." 유사어라면 잔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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