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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커다란 마음의 짐이다. 성경의 잠언에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지만, 질투는 뼈에 썩음이다." 라는 말이 있다. 가슴에 사람에 대한 미움을 품는 자들은 아마도 이 '뼈에 썩음' 이라는 말이 어떤 것인지 절감하리라. 미워한다는 것도 쉬운 경험은 아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미운 일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어떤 이'가 콕 찍어 죽도록 미운 일은 사실 별로 없다.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나의 반쪽'을 만나는 일 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내 인생의 진창과도 같다. 너무나 더럽고 축축하고 기분 나쁘고 거기에서 발을 빼고 싶지만,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칠수록 더욱더 빠져들게 되는 진창, 흙구덩이와 같다. 그런 괴로움으로 허우적거릴 때, 레싱의 단편 '흙구덩이'를 읽었다. 레싱의 글을 읽다보면,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삶과 내 삶에 교집합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사람은 어떻게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을 이렇게 정확한 단어로 설명하고 있을까. 이 사람은 어떻게 나와 이렇게나 같은 경험을 한걸까.. '흙구덩이'의 사라는 남편을 빼앗겼다. 완벽한 부부로서 평온하게 지내온 10년의 결혼생활을 부순 그 여자는 윤기나는 검은 피부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를 가진 로즈, 집시여인이다. 불가사의한 매력을 지닌 로즈는 단 3시간만에 사라의 10년 결혼생활을 끝장내버렸다. 그리고 이제 20여년이 흐른 후, 제임스가 다시 그녀를 찾아 온다. 그는 사실상 로즈에게서 도망치고 싶어한다. 사라에게 단 둘만의 도보여행, 조용하고 평온한 여행을 가자고 졸라댄다. 거절하고 그를 돌려보내지만 실상 사라는 마음이 끌린다. 그저 여행이다. 안될게 뭐가 있지? 사라는 들끓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곧 로즈에게서 걸려올 전화를 상상한다. 그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제임스가 여기 온 것도, 그가 사라와 떠나려하는 것도. 로즈는 아마 지금쯤 제일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남편이 전부인을 만나고 있으며 자신이 곧 남편을 잃게 될거라고.. 로즈는 친구들을 시켜, 딸을 시켜, 곧 전화를 할 것이다. 그녀는 사라의 행동반경을 관찰하기위해 사라에게 친구가 되자고 할 것이며 저녁 식사에 초대할 것이다. 식탁의 끝에 앉은 제임스와 사라를 면밀히 관찰하겠지. 사라는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로즈의 모든 비열한 거짓말과 극적이고 과장된 연기를 상상한다. 이 로즈라는 여자는 흥미롭고 혐오스러운 캐릭터다. 이런 사람을 실제로 만나보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는 건너 건너 아는 누군가 중에 로즈와 같은 사람을 한명 정도는 알고 있다. '모든 여자가 본능적으로 첫눈에 알아보는 특정한 부류의 여자. 그리고 모든 남자가 매혹되거나 불편해하고 싫어하면서도 즉시 반응해야만 하는 여자. 어떤 남자도 로즈에게 절대 무관심하지 않다.' '그녀는 암컷이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점잖은 여성이 증오하는 근본적으로 시궁창 같은 암컷이다.'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힘이란! 그 힘은 이기심에 뿌리를 둔,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비양심적인 힘이었다. 로즈에게는 인간으로서 이것 또는 저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결코 들지 않았다. '인간은 그럴 수 없어요. 모르겠어요?' 라고 로즈에게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로즈에 대한 문장들을 읽으며 나도 '그녀'에 대해 생각한다. 어쩜 로즈와 그리도 비슷한..그 모든 극적이고 과장된 언행들. 지구의 자전축이 자신이라도 되는 듯, 모든 것의 중심에 서서 지휘하려드는 '그녀'의 교활한 눈짓. 어리석고 비양심적인 '그녀'의 힘. 진절머리가 난다. 사라도 역시 진절머리가 난다. 도망치고 싶다. 이 방에서, 런던에서. 하지만 나의 '그녀'는 진절머리 나는 암컷이고 거짓말쟁이지만 불쌍한 중생이다. 난 계속 진절머리를 내며 불쌍한 '그녀'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의 처절한 인생역정. 그리도 극적이고 이기적이고 거칠 수 밖에 없게 만든 '그녀'의 인생과 환경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리도 증오스러운데도 또한 동시에 동정할 수 밖에 없는 나의 이 모순된 감정에도 진절머리가 난다. 토악질이 난다. 사라도 진절머리를 내며 로즈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로즈의 과거. 거짓말을 숨 쉬듯 하는 로즈는 포로 수용소에 있었다. 검은 구덩이같은 수용소에 사람들이 내던져지고 떨어지고 사라졌다.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투쟁했다. 그리고 로즈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살아남았다. 정상적인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던 로즈는 '안전하고 질서 잡힌 이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들을 결코 파악할 수 없었다. ' 로즈에게 결혼은 흙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동앗줄이었다. 제임스는 그녀의 동앗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결혼도 허물어지려한다. 로즈는 미친 듯이, 필사적으로, 겁이 나서, 제정신이 아닌 채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는 로즈의 모든 이기심과 교활함, 비열함이 공포와 불안에서 나오는 것임을 이해한다. 그녀는 살아 남기 위해 사라에게서 남편을 빼앗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임을 이해한다. 이제 제임스가 떠나면 로즈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그녀는 자살할 것이었다. 사라는 이제 급히 짐을 싼다. 아마도 로즈에게서 걸려오는 전화가 계속 울리고 있지만 받지 않는다. 빠르게 런던을 빠져 나간다. 사라는 이 모든 '흙구덩이'에서 빠져 나간다. 홀가분하게 모든 '흙구덩이'에서 빠져나가는 사라를 보며 난 부러워서 또 슬퍼서 가슴이 저리다. 난 그렇듯 발을 빼 나의 흙구덩이에서 도망쳐 나갈 수 없음이 너무나 슬프다. 흙구덩이에서 떠나는 사라에 내 모습이 겹쳐지며 난 부럽고 슬프면서 환희를 느낀다. 내 자신이 빠르게 진창에서 벗어나는 듯 환희를 느낀다. 레싱의 글을 읽으면 항상 무언가 하나 가슴에 꽂히는게 있다. 레싱은 이전처럼 극적인 장치를 사용하지 않는다. 극적인 캐릭터와 정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떤 지리적 장치나 시간적 장치를 사용하지 않으며, 공간과 소품과 문장이 모두 일상적이고 조용하고 담담해졌다. 단편집 '런던 스케치'는 그러한 담담한 단편들로 빼곡히 차 있다. 까페에서 참새들을 바라보며 자녀문제를 이야기하는 부부, 자궁병동에 입원한 여자들, 공항 로비에서 떠드는 두 자매, 장미를 다듬으며 싸우는 모녀, 진절머리 나는 전남편의 와이프에게서 도망치려는 사라...이런 담담한 영국인들의 일상적 이야기들 뿐이지만, 한편 한편이 가슴에 작은 펀치를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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